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사 44:2)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신앙의 정의
지난주 화요일 몇몇 남성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동안 교회의 이곳저곳 하는 일이 많아서 쉬기를 원하는 친구는 이 모임에서 일단 사라지기로 하였고, 나머지 네 사람중에 한명은 수학교육과 편입으로 학기가 시작이 되어서 공부를 해야할때가 되어 모임에서 당분간 배려를 원했다. 그날은 우리 모임의 방향성이 상실되어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일단 모임을 해서 의견을 듣고자 하는 자리였다.
나에게 있어 그동안의 신앙은 누군가에 의해 주입되어 왔으며 그것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때 늘상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주변과의 관계문제가 더 크게 보이는 것을 경험해 왔다. 다양한 신앙서적과 넘쳐나는 복음성가 및 찬송가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최우선에 놓는다. 그것이 틀리다는 것을 부정한 적은 없다. 그런데 늘상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좋아지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그리스도는 교회가 잘되는 것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본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위로받고 교제하고 은혜와 충만을 얻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돋자리 깔고 밤세워 기도하고 성경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읽다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최근에 난 그것이 얼마나 단편일률적인 교회 설교교육의 효과인지 다시한번 돼 새겨볼 수 있었다. 사실 여러가지가 불편해진 지금, 교회가 가지는 영적인 권위와 목회자가 가지는 영적인 권위를 생각해 본다. 좀더 배운 사람이 좀더 배우지 못한 사람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다만 선택받은자와 그렇지 못한자로 교회는 이분화 되어 있을 뿐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난 이제 신앙을 멀리서 보고 싶다.
이미 나를 앞서 살아갔던 현자들은 삶의 궁극적 목적을 말해주거나 삶의 허무함을 노래하였다.
난 단 한마디만 하고 싶다. "타인에 의한 타인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신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신앙의 정의
지난주 화요일 몇몇 남성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동안 교회의 이곳저곳 하는 일이 많아서 쉬기를 원하는 친구는 이 모임에서 일단 사라지기로 하였고, 나머지 네 사람중에 한명은 수학교육과 편입으로 학기가 시작이 되어서 공부를 해야할때가 되어 모임에서 당분간 배려를 원했다. 그날은 우리 모임의 방향성이 상실되어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일단 모임을 해서 의견을 듣고자 하는 자리였다.
핵심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말씀을 많이 나누고
- 모임이 예수그리스도 중심적이었으면 좋겠다.
- 회사생활이 바빠서 말씀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갈 수 없는 황무지 같은 삶에서 조용히 삶을 사는것에 대한 만족감이 있었다.
- 신앙이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었음한다.
- 책을 통해 나눔이 있었으면 좋겠다.
- 누구때문에 무엇을 했으면 안될것 같고 마음가짐에 열심이 있었으면 한다.
- 한 Chapter 를 한단위로
- 오후 예배시간에 설교로 다시 목사님이 가르치고 있으니...
- 말씀을 많이 나누고
- 모임이 예수그리스도 중심적이었으면 좋겠다.
- 회사생활이 바빠서 말씀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갈 수 없는 황무지 같은 삶에서 조용히 삶을 사는것에 대한 만족감이 있었다.
- 신앙이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었음한다.
- 책을 통해 나눔이 있었으면 좋겠다.
- 누구때문에 무엇을 했으면 안될것 같고 마음가짐에 열심이 있었으면 한다.
- 한 Chapter 를 한단위로
- 오후 예배시간에 설교로 다시 목사님이 가르치고 있으니...
나에게 있어 그동안의 신앙은 누군가에 의해 주입되어 왔으며 그것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때 늘상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주변과의 관계문제가 더 크게 보이는 것을 경험해 왔다. 다양한 신앙서적과 넘쳐나는 복음성가 및 찬송가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최우선에 놓는다. 그것이 틀리다는 것을 부정한 적은 없다. 그런데 늘상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좋아지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그리스도는 교회가 잘되는 것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본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위로받고 교제하고 은혜와 충만을 얻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돋자리 깔고 밤세워 기도하고 성경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읽다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최근에 난 그것이 얼마나 단편일률적인 교회 설교교육의 효과인지 다시한번 돼 새겨볼 수 있었다. 사실 여러가지가 불편해진 지금, 교회가 가지는 영적인 권위와 목회자가 가지는 영적인 권위를 생각해 본다. 좀더 배운 사람이 좀더 배우지 못한 사람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다만 선택받은자와 그렇지 못한자로 교회는 이분화 되어 있을 뿐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난 이제 신앙을 멀리서 보고 싶다.
이미 나를 앞서 살아갔던 현자들은 삶의 궁극적 목적을 말해주거나 삶의 허무함을 노래하였다.
난 단 한마디만 하고 싶다. "타인에 의한 타인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신앙이 되기를 바란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