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최근 교회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의견의 글이며 전체를 대표하거나 평가하고자 함이 아니며 현재 있는 것을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정리해 두었을 뿐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둡니다. 교회는 말 그래도 회중이 모이는 곳입니다. 어느 곳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면 이끄는 측과 이끌어 지는측의 피지배 계층이라는 이중구도를 갖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이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하더라도 구조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 보면 금방 판단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 = 하나님의 대변자라는 공식)그것이 권위의 속성이며 그 속성에 충실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구조로 변해가는 것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속에서 일어납니다.
1. 일의 진행사항에 대한 책임감
자신이 속해 있는 어느 집단에서든 끊임없이 결과를 만들어 내고 좋은 방향을 위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런데 그 고민의 장이 축소되어 몇몇 제한된 사람들이 만들어낸 한정적인 공간은 타자처럼 그 정해진 곳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낯선 장소로 변해간다. 일이란 내가 계획해서 주도적으로 처리해 가는 일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계획해서 따라가는 것이 있다. 전자는 능동적 대처방안을 강구해 나가지만 후자는 수동적 태세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후자의 경우는 일의 경중을 따지는 것보다는 일의 과정을 중요시 하게 된다. 구성원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교회는 그 속성상 목회자 또는 사역자가 절대적 권한을 갖게 된다. 이는 예배시간에서도 나타나게 되는데 가령 예배 형식이 바뀌기 전 우리교회의 예배시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 시간분포는 그 길이와 상관없이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신앙고백과 찬송이 30% 설교 60% 나머지 10% 정도가 광고와 기타 마무리를 위해서 사용된다. 그래서 어찌보면 예배의 상당부분이 설교 듣는 시간으로 생각하게 된다. 아마두 목회자의 경우는 그 권리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부흥이 설교를 통한 사람의 변화에 있는 것인지 사람의 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위한 것인지는 각 구성원들의 신앙고백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고 봐야한다. 최근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모습은 원맨쇼와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발적인 예배의 중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의는 주도층의 세밀하지 않은 준비에서 잡음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그것으로 인해 점차 이해의 간극은 벌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적극적 참여를 멀리한 지체들에게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내가 일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하게 한다는 진리의 말씀을 차치하고서라도...) 다른 사람의 일이라 여기게 된다. 이때부터는 심각한 내면의 고민을 하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
2. 기도와 행위
사람은 자신이 현재 배우고 살아가고 있는 영역을 뛰어넘어 생각할 수 없다. 즉, 세계화의 흐름속을 쳐다보며 파헤쳐내던 사람은 그 경험된 영역의 틀에서 사역의 방향을 세워가겠지만 이와 달리 자신이 활동하는 반경안에 있는 영역과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았을때는 그 틀을 벗어난 그 이상의 영역에는 접근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정보를 흡수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선배들에게 배웠던 것들을 근거로 그 경험담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는 것도 어찌보면 신앙의 선배들이 실패했던 경험을 언급하지 않는 것에서 균형을 잃었다고 봐야 한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실 것에 대한 믿음은 그 행하실 일을 위해 내가 행동하는 행위가 있어야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기도하고 그 기도의 응답을 끊기있게 기다리는 흐름이 많아지면서 그것이 최고의 대안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이 나쁘기만 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 사람이 계획해서 실행하는 것은 인위적이고 좋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이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실패감으로 돌아오게 된다. 여러사람이 모여있는 곳에서 각자 다른 은사를 소유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장점과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장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가 속한 교회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린도 전서 12장 28절) 우리 각자는 어느 위치에 속해 있는 것일까?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교회에서는 한두사람의 스타가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국적 사역구조내에서는 한두사람의 중심축이 필요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민주적 절차에 의한 예배구조를 만드는 것보다는 권위를 가진 몇몇 지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부터 그렇다.
3. 대안적 공동체인가?
정에 굶주릴수록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 마음껏 재잘거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연약함이다. 그것은 내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 신앙생활, 생활고를 포함하여 삶의 총체적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포함한다. 대안이라는 것은 나쁜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내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것을 주도해 나가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모아가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하는 것일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주인행세를 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손님은 언제나 머물다 떠나기때문에 지금 속해있는 공동체가 나가야할 방향과 흐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러나 주인은 손님이 떠나가면 그가 다시 올 수 있도록 갖가지 이유와 친절을 베풀기도 해야 한다. 여기서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권리에 대한 태도가 결정되며 공동체는 나의 것이어서 그속에 계속 소속되어 견고한 고리를 형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란 선택사항으로 이어지게 된다. 교회가 위치한 지리적 여건도 중요하지만 내가 왜 이 교회에 있느냐에 대한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다른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론
많은 대안적 제시를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므로 짧은 소견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우리가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때 아래의 것들이 항상 고려되었으면 좋겠다.
- 교회일의 진행 사항은 가능하면 공개하여 의견 소통의 장소를 마련한다.
- 설교를 예배의 전부가 아닌 그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도록 시간 안배를 한다.
- 정해진 시간안에 예배를 드린다.
- 성도간의 소통이 있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
- 주일학교 온전한 예배로 따로 분리한다. (사실 2시간 가까이를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은 예배의 산만함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부모인 당사자와 아이들이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이를 위한 대안중의 하나라면 그 아이들이 충분히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아이들끼리 모아놓으면 그것을 보아줄 한두 사람의 보호자로도 충분할 것이다. 13명의 아이들을 이제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